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관세정책의 여파로 미국 내 생산기지를 확보하려는 한국 기업들이 늘면서 미국 버지니아주의 페어팩스 카운티가 새로운 투자처로 부상하고 있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DC에 인접한 이곳은 전 세계 45개국에서 진출한 410여 개의 기업이 몰려들며 ‘동부의 실리콘밸리’로 주목받고 있다. 한국 기업만 해도 60여 개에 이른다.
이곳에서 한국 기업의 유치를 돕고 있는 브라이언 한 페어팩스 카운티 경제개발청 본부장은 24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정책이 발표된 후 한국에 있는 대기업·중소기업·스타트업까지 진출 문의가 훨씬 많아졌다”며 “관세 부과 전보다 문의가 50% 이상 늘었다”고 말했다. 그는 “식품·음료 제조 업계를 중심으로 문의가 급증했고 일부 대기업과 중견기업은 제조 부지를 직접 알아보기 위해 시장조사팀을 현지에 파견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페어팩스 카운티는 정보기술(IT), 전기차, 우주항공, 인공지능(AI) 등 첨단산업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다. 현대자동차는 2028년까지 미국 현지에 총 210억 달러(약 30조 원) 규모의 투자를 집행하기로 했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3월 트럼프 대통령이 주재한 발표 행사에서 “향후 4년간 (미국 내) 210억 달러 추가 투자를 기쁜 마음으로 발표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대기업의 잇따른 미국 내 생산기지 가동과 투자 확대는 관세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한 행보라는 해석이 나온다. 한 본부장은 “(관세를 안 내기 위해) 메이드 인 아메리카가 돼야 하니까 제조 업체들이 많이 문의하고 있다”면서 “제조 업체는 없는데 판매 법인만 있는 기업들도 관세 소식 이후 여기에 공장을 세워야 되는 거 아니냐고 말했다”고 설명했다.
실제 트럼프 행정부가 한국에 상호관세 25%를 90일간 유예하기는 했지만 관세 리스크와 불확실성 자체를 피하기는 어려워 한국 기업의 타격이 큰 상황이다. 이 때문에 4월 1~20일 대미 수출은 61억 8200만 달러로 1년 전 같은 기간보다 14.3% 급감하면서 한국 기업이 관세 영향을 가장 크게 받고 있다. 거기에다 자동차 등 품목관세 부과로 자동차 수출 역시 같은 기간 전년보다 6.5% 감소하면서 직격탄을 맞고 있다.
한 본부장은 지난 1년간 한국 기업만 해도 5~6곳이 신규로 페어팩스 카운티에 입주했다며 관세 면제 외에도 연방정부와의 조달 계약이 활발한 점 또한 큰 장점으로 꼽았다. 그는 “고학력 인구 비율도 65%에 달해 고급 기술 인력이 풍부하다”면서 “연방정부와 조달 사업 하기에 최적화된 지역”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페어팩스 카운티에 진출한 한화와 한국항공우주산업(KAI) 외에도 삼성에서 분사한 교통 장비 업체 ‘S-트래픽(S-Traffic)’은 워싱턴DC·메릴랜드·버지니아 지하철공사(WMATA)와의 협력을 통해 지하철 개찰구 프로젝트를 따냈다.
이어 한 본부장은 “카운티 내 3000개의 정부 계약 전문 업체와 협력하면 간접 조달 방식으로도 충분히 진입할 수 있다”며 “한국 기업들이 이들과 협력해 공동 개발·납품하는 방식이 늘고 있다”고 덧붙였다. 페어팩스 카운티는 AI, 사이버 보안, 우주항공, 양자기술 분야에서 큰 강점을 가지며 핵심 산업으로 육성 중이다. AI 관련 종업원 수도 올 2월 기준 실리콘밸리를 추월한 것으로 나타났다.
5월 초까지 방한 일정을 소화하는 그는 한국의 여러 대기업과도 투자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그는 “우주항공·방산·양자·원전 등 여러 한국 대기업과 함께 미국 진출과 투자와 관련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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