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당국은 그동안 석유화학 업계의 선제적인 자구책이 마련돼야 금융 지원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그러나 대주주(한화·DL그룹) 간 이해관계가 다른 여천NCC를 비롯해 각 석화 기업들이 실효성 있는 구조조정 방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금융 당국의 판단이다.
금융 당국의 한 관계자는 30일 “현재 석화 기업들은 자산 매각과 증자·차입 모두를 해야 할 것”이라며 “한두 가지만으로 해결이 되면 좋겠으나 지금 상황이 그렇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석유화학 업계가 올해 말까지 사업 재편 자구안을 내기로 협약을 맺은 지 한 달이 지났지만 서로 눈치작전을 펴면서 자율 협의가 공전하고 있다. 석화사와 정유사 간 나프타분해설비(NCC) 수직 계열화 추진이 큰 흐름으로 형성됐지만 기업마다 구조조정의 필요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석화 업계는 여수(LG화학·GS칼텍스), 대산(롯데케미칼·HD현대오일뱅크), 울산(SK지오센트릭·대한유화) 등 국내 3대 석화 산업단지에서 정유사와 석화사의 NCC 설비를 통폐합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하지만 기업 간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며 논의가 구체적인 성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특히 울산에서 SK와 협상을 벌이고 있는 대한유화는 자체적인 구조 혁신을 통해 적자에서 벗어날 것으로 보이자 NCC 통합 자체에 부정적 태도를 내비치는 것으로 알려졌다.
석화사들은 또 중국과 일본이 적극적인 구조조정으로 먼저 설비를 폐쇄하면 찾아올 상승 사이클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실제 에틸렌 수익 지표가 상승하기 시작하며 추세적 반등 조짐을 보이고 있다. 29일 기준 에틸렌 스프레드(원재료인 나프타와 에틸렌 가격 차이)는 톤당 220달러다. 손익분기점인 250달러보다 아직 낮지만 1년 전(131달러)에 비하면 68%나 올랐다.
하지만 금융 당국은 더 이상의 시간 끌기는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권대영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은 “시장과 채권 금융기관이 예의 주시하고 있다”며 “연말까지 기다릴 것 없이 시장에서 의구심을 걷어내고 의지와 실행력을 확인할 수 있도록 석화 업계가 구체적인 사업 재편 그림을 조속히 보여주기를 바란다”고 요구했다.
금융 당국은 석화 산업 구조조정을 미룰 수 없다고 보고 있다. 한국투자증권에 따르면 여천NCC의 부채비율(별도 기준)은 2023년 말 276.9%에서 올해 6월 말 현재 338%로 치솟았다. 1년 반 사이에 61.1%포인트나 뛴 것이다. HD현대오일뱅크와 롯데케미칼의 합작사인 HD현대케미칼의 부채비율은 같은 기간 221.8%에서 320%로 98.2%포인트나 상승했다.
이는 2019년부터 중국 석화 기업의 증설이 시작됐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기업들이 제때 설비 조정에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신용평가는 2017~2018년 한국 내 주요 석유화학제품 설비 가동률이 평균 93.5%에 달했지만 2019년부터 올해 6월 사이에는 81.4%로 떨어졌다고 추산했다. 이에 따라 국내 석화 생산능력을 18.4%는 감축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금융 당국과 채권단은 석화 기업을 계속 압박할 계획이다.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추경호 국민의힘 의원실이 입수한 채권 금융기관 자율협의회 운영 협약안을 보면 채권단은 석화 기업의 사업 재편, 재무 운용 계획 타당성을 검토할 수 있게 된다. 필요한 경우에는 외부 기관의 실사를 요구할 수도 있다.
석화 기업이 정당한 사유 없이 채권단 약정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채권단의 구조조정 지원 절차는 중단된다. 구조조정 지원이 중단된다고 해도 채권단이 새로 지원한 자금에는 전액 상환 때까지 우선변제권이 붙게 된다. 금융 당국의 한 관계자는 “사실 만기 연장만으로도 지원 대상 기업에는 큰 도움이 되고 채권단에는 부담이 큰 부분”이라며 “일단 지원 방안을 마련했으니 자구책을 서둘러 마련하라는 신호”라고 설명했다.
한편 구조조정이 미뤄지면서 석화 산업의 생산·고용 감소세가 심화하고 있다. 한국산업단지공단에 따르면 올해 2분기 여수 국가산단 입주 업체의 고용 인원은 2만 1125명으로 3년 전(2만 5096명)보다 15.8%나 감소했다. 올 1~6월 생산액 역시 41조 7412억 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6% 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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