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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람-피터 슈라이어] "자동차 디자인은 협상의 연속...조율·지휘자 자질 필수죠"

■현대기아차 디자인 총괄 사장

출시차량 모두 직접 타보고 운전

여행하며 디자인의 영감 얻어

만났던 사람들과의 케미도 좋고

한국인들의 열정·의욕에 끌려

2006년 기아차 디자인 총괄 도전

현대차 '카리스마 느껴지는 리더'

기아차는 '젊은 도전자' 이미지

일관된 브랜드 가치 심어줘 뿌듯

피터 슈라이어 현대·기아차 디자인 총괄 사장(CDO)이 지난 5일 경기도 화성시 롤링힐스호텔에서 진행된 인터뷰 이후 자신의 차인 기아차 ‘스팅어’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는 “디자이너는 모든 차를 다 경험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진제공=현대·기아차




세계 3대 자동차 디자인 거장으로 평가받는 피터 슈라이어 현대·기아차(000270) 디자인 총괄 사장은 국내 자동차 디자인계의 히딩크로 불린다. 거스 히딩크 감독이 지난 2002년 한일월드컵 4강 신화를 쓰며 한국 축구 수준을 한 단계 높여놓은 것처럼 슈라이어 사장도 한국 자동차 디자인의 신기원을 연 인물이기 때문이다. 현대·기아차의 디자인은 슈라이어 사장이 오기 전과 후로 나뉜다. 변방에 있던 한국 자동차 산업을 중심으로 옮긴 일등공신이다.

한 달에 열흘 정도만 한국에 머물고 미국과 독일 등 주요국 디자인 센터를 돌며 현장을 챙기는 그를 5일 경기도 화성시 롤링힐스호텔에서 만났다. 예상은 했지만 슈라이어 사장은 역시나 검정 뿔테안경에 검정 셔츠, 검정 슈트, 검정 구두 차림으로 나타났다. 두꺼운 겨울 외투마저도 검정이었다. 오직 목에 두른 검정 스카프의 물방울무늬만 흰색이었다. 그는 “화려한 색의 옷을 입어 디자이너가 돋보이기보다는 자신이 디자인한 차에 더 집중해 달라는 의미로 검정 의상을 즐긴다”고 말했다.

자리에 앉아 히딩크 이야기를 꺼내자 활짝 웃으며 “내년 월드컵에서 독일이 한국과 같은 조가 된 것은 알고 있느냐”고 되물었다. 독일인 특유의 축구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한국이 불리할 것 같다고 하자 “축구는 늘 그렇듯 붙어봐야 아는 것”이라고 답했다. 한국 회사 입사 11년 차의 ‘한국 사랑’이 느껴졌다.

슈라이어 사장은 2006년 정의선 현대차(005380) 부회장(당시 기아차 사장)의 삼고초려 끝에 기아차 디자인 총괄 부사장으로 영입됐다. 아무리 좋은 차를 만들어도 디자인이 나쁘면 소비자는 지갑을 열지 않는다는 판단에서다. 2012년 말에는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현대·기아차 국내 본사 사장으로 승진했다. 2013년부터는 현대차와 기아차 디자인을 모두 총괄하고 있다.

목소리 톤은 겸손했고 차분하면서도 힘이 있었다. 왜 자동차 디자이너가 됐는지 묻자 “어릴 때 내게 예술적 감각이 있는지, 뭘 하고 살아야 할지 잘 몰랐다”며 “어느 날 뮌헨대에 산업디자인과가 신설된다는 포스터를 접하고 인생이 바뀌었다”고 웃었다. 1953년 독일 바이에른주 바트라이헨할에서 태어난 그는 1975년 뮌헨대 응용과학대학 산업디자인학과에 입학, 1978년 아우디에 인턴으로 자동차 업계 첫발을 내디뎠다. 인턴 당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해 아우디의 장학금을 받으며 대학 졸업 후인 1979~1980년 런던예술대 수송디자인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1980년부터 아우디에서 외장·인테리어·콘셉트 디자인 담당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이후 폭스바겐 디자인까지 총괄했다.

그의 포트폴리오는 화려하다. 아우디의 아이코닉 스포츠카 ‘TT’를 비롯해 아우디 A3와 A6, 폭스바겐의 대표작 뉴 비틀, 골프 등도 그의 손을 거쳐 베스트셀링 모델이 됐다. 사람들은 그의 단순 명료하지만 멋스러운 디자인 철학에 반했고 슈라이어를 BMW의 크리스 뱅글, 재규어의 이언 칼럼과 함께 세계 3대 자동차 디자이너로 꼽기 시작했다. 2006년 슈라이어가 기아차로 옮긴 후 폭스바겐그룹의 수장인 페르디난트 피에히 이사회 의장은 “인생에서 무언가를 잃은 것에 대해 후회한 적은 없으나 슈라이어가 기아차에 가게 둔 것을 가장 후회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에게 왜 기아를 선택했는지 물었다. “사람에 끌렸다”고 했다. 그는 “당시 기아차와 한국에 대해 많이 알지 못했는데 한국 사람들의 열정과 의욕에 끌렸다”고 말했다. 이어 “독일이 자동차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했지만 한국은 다른 매력이 있었다”며 “특히 만났던 사람들과의 케미스트리가 좋았다. 정감도 있었다”고 답했다.

한국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묻자 “현대·기아차에 각각 일관된 브랜드 가치를 심어준 것”이라고 답했다. 실제로 그는 기아차에 온 뒤 누가 봐도 기아임을 알 수 있는 정체성을 심어줬다. 호랑이코 그릴이 대표적이다. 현대차도 슈라이어의 손을 거치며 헥사고날 그릴로 대표되는 일관성을 갖게 됐다. 그가 한국에서 만진 차들은 소위 ‘대박’이 났다. K5는 국내 중형 세단의 새 기준이 됐다. 카니발·쏘렌토·스포티지는 국내외서 큰 인기를 얻었다. 현대차 아반떼나 제네시스 주요 차량, 최근 코나도 그의 손을 거쳤다.



현대·기아차의 디자인 키워드를 물었다. 그는 “현대차는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리더(charismatic leader) 이미지를 파도가 치고 물방울이 떨어지듯 자연스럽고 힘이 넘치는 디자인으로 풀어낸다”고 했다. 기아차는 “젊은 도전자(youthful challenger)”로 지칭했다. 그는 “기아는 브랜드 의미처럼 기술로 정갈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현대와 기아는 선의의 경쟁은 하겠지만 다른 브랜드이고 세계와 경쟁한다”며 “제네시스 역시 또 다른 차원의 브랜드로 앞으로가 더 기대된다”고 답했다.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일만큼 힘든 일도 없다. 자동차 디자이너의 삶이 힘들지는 않을까. 그는 “자동차 디자인은 꿈의 직업이다. 이 일을 하지 않았으면 무엇을 했을지 모를 정도로 꿈꿔온 일”이라고 했다. 힘든 부분은 많은 편견과 부딪혀야 하는 점을 들었다. 그는 “자동차 디자이너는 자신만의 확고한 비전을 바탕으로 보수적인 사람들을 납득시켜야 한다”며 “디자인은 너무 많은 의견과 요구가 있고 너무 많은 비판은 성장을 막는 장애물”이라고 답했다. 슈라이어 사장은 2년 전 선보인 4세대 스포티지를 떠올렸다. 파격적인 디자인으로 네티즌들은 혹평했다. 그는 “처음에 한국에서만 유독 비판이 많았다”며 “하지만 결국 스포티지는 가장 큰 성공을 거둔 모델이 됐다”고 말했다. “편견을 깨지 못하면 결국 평균 수준의 디자인밖에 안 된다”고 덧붙였다.

자동차 디자이너는 단순히 선만 잘 그어서 되는 일은 아니라고 했다. 협상가 자질도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슈라이어 사장은 “엔지니어와 재무·제품 쪽 사람들과 늘 협상하고 마케팅 및 영업 인력들과 함께 일하고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팀 리더로서의 자질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히딩크 감독의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축구 감독이 선수의 장단점을 알고 동기를 부여해 좋은 결과물을 낸다”며 “나 역시 디자이너로 구성된 팀의 특징을 파악하고 이를 조율하는 지휘자 같은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무슨 차를 타는지 묻자 호텔 로비 창문 밖으로 손가락을 가리켰다. 기아차의 스팅어가 있었다. 붉은색 3.3 터보 AWD 모델이었다. 현대차그룹은 사장급에게 제네시스 차량을 제공한다. 하지만 슈라이어는 스팅어를 선택했다. 그는 “독일에서는 K9도 타고 한국에서 제네시스를 타기도 한다”며 “하지만 사장이라고 고급차 뒷좌석에 편하게만 앉아 있는 건 옳지 않은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프라이드·코나·스팅어 할 것 없이 운전해보고 타본다”며 “자동차 디자이너는 차와 제품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현대·기아차 임원들에게 큰 시사점을 주는 발언이다.

평소 디자인의 영감은 여행을 통해 많이 얻는다고 했다. 그는 “건축이나 새로운 스포츠, 사람, 새로운 음악, 완전히 새로운 것들을 흥미 있게 본다”며 “특히 여행을 하며 한국이나 미국인의 삶, 중국인이나 인도인 등 각국의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기대하는지, 차를 어떻게 이용하는지, 차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디자인을 시작한다”고 말했다.

여가에는 영화를 즐겨 본다고 했다. 자동차 디자이너가 되지 않았다면 영화 산업도 재미가 있었을 것이라고 답했다. 영화 중에서도 실화에 바탕을 둔 성공 스토리, 누군가가 영웅이 되는 이야기를 좋아한다고 했다. 가장 최근에 본 영화를 추천해 달라고 하자 ‘히든 피겨스’를 언급했다. 흑인 여성이 사회적 편견을 딛고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한 이야기다. “영화를 보면 어떤 시나리오로 어떤 이야기를 풀어가게 될까 기대하듯 스팅어나 쏘울 같은 차를 타면 다른 이야기가 펼쳐질 것 같다는 기대를 하게 된다는 점에서 자동차와 영화는 비슷하다”며 웃었다.

/화성=강도원기자 theon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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