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사피온과의 합병은 KT·SK텔레콤이 ‘원팀’이 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인공지능(AI) 반도체 관련 ‘규모의 경제’ 효과가 본격화할 것입니다.”
박성현(사진) 리벨리온 대표는 12일 서울경제신문과의 단독 전화 인터뷰에서 사피온과의 합병 추진 배경을 이같이 설명했다. 기존 리벨리온의 성장을 지원했던 KT의 협력 체계에 SK텔레콤이 힘을 보태는 방식으로 대한민국 AI 반도체 연합이 탄생하게 됐다는 설명이다.
사피온과 리벨리온은 해외 빅테크들이 AI 반도체에 대규모 자본을 투입하고 우수 인력을 독식하는 상황에서 국내를 넘어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합병을 통한 시너지 창출이 시급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박 대표는 “엔비디아 등 빅테크들이 빠르게 앞서 나가고 있는 상황에서 양 사가 절박한 마음에 힘을 합치기로 한 것”이라면서 “한국에만 신경망처리장치(NPU) 기업이 2~3개 있는 것도 비효율적인 측면이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현재 글로벌 AI 반도체 시장은 엔비디아가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엔비디아의 아성을 깨기 위해 마이크로소프트(MS), 오픈AI, 메타, 아마존, 애플 등이 차세대 AI 반도체 개발에 뛰어든 상황이다. MS는 지난해 11월 연례 개발자 회의 ‘이그나이트 콘퍼런스’에서 자체 생산한 AI 반도체를 선보였다. 오픈AI는 AI 반도체 회사를 설립하기 위해 중동 지역에서 수십억 달러 규모의 투자금 유치에 나섰으며 메타는 최근 자체 개발 AI 반도체인 ‘MTIA’에 이어 2세대 제품인 ‘아르테미스’를 출시했다. 빅테크 기업 중 가장 먼저 AI 칩을 출시했던 구글은 최근 최신 칩을 자사의 대규모언어모델(LLM) ‘제미나이’에 적용했다.
박 대표는 여러 NPU 개발사 가운데 사피온과의 합병을 결정한 배경에 대해서는 “대기업과 스타트업이 협력하는 것이 시너지가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저희의 강점이 사피온의 약점일 수 있고 사피온의 강점이 우리의 약점일 수 있다고 봤다”고 했다.
리벨리온과 사피온이 최근 투자 유치에서 각각 8800억 원과 5000억 원의 기업가치를 평가받은 만큼 합병에 따른 규모의 경제를 실현한다면 빅테크에 맞서 경쟁력을 갖춘 AI 반도체 기업으로 성장할 것으로 기대된다. 그동안 SK그룹과 리벨리온의 전략적투자자(SI)인 KT는 두 회사의 성장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KT는 리벨리온에 투자한 후 KT클라우드 산하 데이터센터에 리벨리온의 NPU 탑재를 결정하는 등 투자는 물론 제품 상용화도 지원했다. 사피온 역시 SK하이닉스로부터 D램을 원활히 공급받으면서 NPU 개발에 속도를 낼 수 있었다.
2020년 설립된 리벨리온은 출범 초부터 대규모 투자를 유치하며 국내를 대표하는 AI 반도체 기업으로 입지를 다졌다. 누적 투자금만 2600억 원에 달한다. 사피온은 2016년 SK텔레콤의 내부 연구개발(R&D) 조직에서 분사되는 형태로 출범했다. SK텔레콤이 지분 약 62.5%를 보유한 최대주주이며 SK하이닉스와 SK스퀘어 등이 주요 주주다.
리벨리온과 사피온의 합병은 이제 출발점에 선 상황이다. 앞으로 주주들의 동의, 합병 비율 산정, 다양한 이해관계 조정 등 여러 과제가 남아 있다. 박 대표는 “합병법인의 경영권을 누가 갖고 누가 대표를 맡을지 아직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다”면서 “다음 주 본격적인 실사 작업을 시작하는데 앞으로 어떤 과정으로 진행될지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이어 “여러 과제가 있지만 일단 긍정적으로 합병이 이뤄진다고 생각하고 진행해나갈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이제 업계의 관심은 합병법인의 3세대 NPU 개발 성공 여부에 쏠린다. 리벨리온은 내년 상반기를 목표로 LLM 시장을 겨냥한 NPU ‘리벨’을 삼성전자와 함께 개발하고 있으며 사피온은 차세대 NPU인 ‘X430’ 출시를 위해 적극적인 R&D를 추진하고 있었다. 두 회사의 기술력이 결합한 차세대 NPU 개발에는 더욱 속도가 붙을 것으로 전망된다. 이병훈 포스텍 반도체공학과 교수는 “국내 기업들끼리 힘을 합쳐 글로벌 시장에 진출한다는 측면에서 이번 합병 추진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한다”고 말했다.
/류석 기자 ryupro@sedaily.com, 김윤수 기자 sooki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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