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루주머니를) 서서 비우니 옷에 묻을 걱정도 없고 얼마나 편한지. 지하에 있다가 일부러 올라왔지 뭐예요.”
4일 분당서울대병원 2동 2층 암센터 내에 위치한 다목적 화장실을 나서던 박미경(58·가명)씨가 김정하 간호사를 반기며 인사를 건넸다. 박씨는 몇 년 전 항문과 아주 가까운 위치에 암이 생겼다. 다행히 수술이 가능한 상태였지만 직장암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본래 항문을 잃고 배에 인공 항문인 장루를 달았다.
지난달 초 분당서울대병원이 새로 설치한 세척기는 박씨와 같은 장루·요루 환자를 위한 시설이다. 장루, 요루는 각각 항문, 방광이 없는 환자의 소장·대장, 요로의 일부를 복벽 밖으로 빼내 변을 내보내는 우회로 역할을 한다. 이곳에 비닐 주머니를 달아 변을 모으는 것이다. 괄약근과 같은 조절기능이 없는 탓에 수시로 주머니를 비우고 깨끗하게 씻어야 하는데, 국내에는 이러한 시설을 갖춘 화장실이 극히 드물다. 암환자들로 붐비는 대형병원 중에서도 장루 환자용 화장실을 갖춘 곳은 분당서울대병원 외에 서울대병원·서울아산병원·세브란스병원·삼성서울병원 등에 그친다. 공공시설에도 분당선 수서역, 대구지하철 2·3호선 청라언덕역만 있는 정도다.
변 주머니를 제때 비우지 못하면 누출이 발생할 뿐 아니라 인공항문 주변에 묻은 배설물로 인해 피부가 짓무르기도 한다. 전국 2만여명에 육박하는 장루 환자들은 대부분 외출시간에 구애를 받고 혹여 냄새로 인해 사람들에게 불편을 끼칠까 봐 노심초사하는 처지다. 특히 사회활동이 많은 젊은 층 환자들이 늘어나면서 고충이 크다. 김 간호사는 “높이가 낮은 일반 변기에서 주머니를 비우려면 무릎을 꿇어야 한다”며 “이 과정에서 옷이나 피부에 오물이 튀거나 처리에 어려움을 겪는 환자들이 많다”고 말했다.
분당서울대병원이 장루·요루 세척시설을 설치한 배경은 대한대장항문학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강성범 외과 교수의 공이 컸다. 장루 환자의 편의성 향상을 넘어 인권 보호 차원에서 필요하다고 적극 어필한 끝에 시설 도입이 전격 추진된 것이다. 올해 초 대림바스가 국내 최초로 장루용 세척기 세트를 개발해 선보이면서 설비 비용이 대폭 낮아진 것도 한몫 했다. 일본은 1998년부터 공공화장실에 장루용 변기를 설치했으며 2000년 ‘교통장벽 제거법’을 제정했다. 2020년 도쿄올림픽을 계기로 공중화장실의 경우 최소 한 칸에 장루용 변기를 설치하자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김 교수는 “상대적으로 소외받는 장루·요루 환자들이 병원에서만이라도 화장실을 편히 이용해야 하지 않겠나. 세척시설이 전국적으로 확대돼 수술 후일상을 누릴 수 있도록 제도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안경진 의료전문기자 realglasses@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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