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굴지의 반도체 기업 A사는 올해 설비투자를 전년 대비 반 토막 이상 줄이는 계획을 세웠다. 최근의 글로벌 경기 불확실성에 고객사의 수주가 부진하자 생산 능력을 적극적으로 늘리지 못하고 보수적인 투자 집행에 나선 것이다.
경기도의 건설 기자재 업체 B사도 마찬가지다. 2월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이후 잇따라 발생한 인명 사고와 경북 지역을 휩쓴 초대형 산불로 인해 전국의 주요 건설 작업이 중단된 영향이다. B사 관계자는 “최근 건설 사업장 수와 인력이 눈에 띄게 줄고 있다”고 말했다.
24일 한국은행이 발표한 1분기 경제성장률이 예상치를 크게 하회해 마이너스 성장률을 보인 것은 계엄·탄핵 정국에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의 관세정책으로 각종 대내외 불확실성이 확대됐기 때문이다. 기업들이 관세 리스크에 투자를 잇따라 보류한 데 이어 초대형 산불 등 예상치 못했던 돌발 악재까지 발생해 내수 경기 여건이 크게 악화됐다.
실제로 올 1분기 건설투자는 전 분기보다 3.2%, 설비투자는 2.1% 줄었다. 건설투자는 계속되는 업황 악화에 4개 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이어갔다. 설비투자는 지난해 3분기(6.5%), 4분기(1.2%)만 해도 높은 성장률을 보였지만 3분기 만에 역성장으로 돌아섰다. 이 때문에 올 1분기 성장률에서 각각 0.4%포인트, 0.2%포인트를 깎아내렸다. 이밖에 민간소비와 정부소비도 각각 0.1% 감소했고 수출도 1.1%하락했다.
내수와 순수출(수출-수입)로 나눠보면 소비와 투자를 포함한 전체 내수는 0.6%포인트 성장률을 갉아먹었다. 순수출은 성장 기여도는 0.3%포인트로 나타났지만 이마저도 수출보다 수입 감소 폭이 그보다 크게 나타난 착시에 불과했다. 수입의 경우 국내 업체들의 산업 수요 감소로 인한 부진이라는 점이 뼈아프다.
문제는 이 같은 역성장이 미 행정부의 관세 영향이 본격화하기도 전에 발생했다는 점이다. 한은은 “1분기 철강·석유제품 수출 부진은 관세보다는 불경기 영향이 더 큰 것으로 보인다”며 “3월 초 시작된 철강 관세 영향은 5~6월에 본격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국의 관세 영향은 2분기 수출에 본격화될 수 있다는 것으로 기술적 경기 침체(2개 분기 연속 역성장)에 대한 경계감을 높이는 대목이다.
이처럼 역대급 침체에 빠진 내수 경기에 통상 불확실성이 현실화될 경우 올해 연간 경제성장률이 0%대에 그칠 수 있다는 전망이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다. 이미 글로벌 주요 기관들은 우리나라 올 성장률을 1% 초반에서 0%대까지 낮추고 있다. 22일 국제통화기금(IMF)이 기존 2%에서 1%로 대폭 낮췄으며 글로벌 투자은행(IB) JP모건은 이날 0.5%로 하향 조정했다. 8일 0.9%에서 0.7%로 내린 지 약 2주 만에 다시 0.2%포인트 내린 것이다. 씨티은행 역시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0.8%에서 0.6%로 0.2%포인트 낮췄다.
이동원 한은 경제통계2국장은 “향후 성장은 우리와 미국 간의 관세 협상뿐 아니라 미국과 중국 간의 협상 문제가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면서 “관세정책이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는 성장률 전망이 의미가 없을 수 있다”고 말했다.
1분기 실질 국내총소득(GDI)도 뒷걸음질쳤다. 지난해 4분기보다 0.4% 감소한 것으로 나타나며 지난해 2분기(-1.2%) 이후 3분기 만에 역성장했다.
이처럼 빠른 속도로 고꾸라진 경제 전망에 한은이 5월에는 금리 인하로 대응할 것이라는 기대가 커진 상황이다. 최남진 원광대 경제금융학과 교수는 “국정 공백에 경기 부양에 대한 질타는 정부가 아닌 한은으로 쏠릴 수 있다”면서 “남은 분기에서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이 한은에 큰 고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현재 미국채의 안전자산 지위 훼손 등 패러다임의 변화로 한은의 정책 결정 가중치도 한국과 미국의 금리 차보다는 국내 경제로 옮겨갈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예상을 벗어난 성장 궤도에 재정과 통화정책 양대 수단을 빠르게 동원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상황을 타개할 획기적 조치가 없으면 역성장 수렁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 효과를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특히 하반기 새 정부에서 2차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한다고 하면 집행까지의 시차를 고려해 성장률 제고 효과는 내년으로 밀릴 가능성이 크다. 수출 부진을 금리 인하로 해결하기도 어렵다.
환율과 가계부채 등 금융 안정 우려로 한은의 정책 운신의 폭도 부족한 상황이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약달러에 원화가 유독 약세를 보이는 상황에서 기준금리까지 내리면 환율이 더 튈 우려가 있다”면서 “경기만 봐서는 금리를 내려야 하지만 환율 때문에 동결에 그쳤던 일이 반복될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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