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연말 전까지 실질적인 자구안을 제출하는 석유화학 업체를 대상으로 1조 원 규모의 정책펀드 지원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해당 기업에는 기존 대출 만기 연장과 이자 감면 등도 제공된다. 다만 금융 당국이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며 최후통첩을 날린 만큼 구조조정을 하지 않고 버티는 기업에는 자금 회수 같은 강제 수단이 동원될 것으로 예상된다.
금융위원회·금융감독원과 17개 은행·정책금융기관은 지난 30일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석유화학 분야 경쟁력 제고를 위한 ‘산업 구조 혁신 지원 금융권 협약식’을 체결했다.
금융 당국은 실효성 있는 구조조정에 나선 석유화학 기업에 1조 원 규모의 ‘기업구조혁신펀드 6호’를 동원해 도울 수 있다는 입장이다. 한국자산관리공사도 생산 시설 같은 자산을 매입한 후 임대(세일즈앤드리스백)하는 방식으로 기업 구조조정을 도울 계획인 것으로 파악됐다. 정부는 정책 보증 지원 가능성도 열어두고 있다.
이날 금융위와 은행들도 기업활력법에 따라 사업 재편 승인을 받은 기업에 △대출 만기 연장 △이자 상환 유예 △추가 담보 미취득 △필요시 추가 자금 지원 등을 하기로 했다.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추경호 국민의힘 의원실에 따르면 채권단 자율협의회 운영 협약안은 대상 기업이 중장기 차입금 감축 계획을 제시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금융 지원이 가능하다고 명시했다. 자율협약 동의 조건도 워크아웃과 동일한 채권액 기준 4분의 3 이상이다.
하지만 이 같은 지원은 석유화학 업체들의 뼈를 깎는 자구책이 전제 조건이라는 게 당국의 일관된 입장이다. 권대영 금융위 부위원장은 이날 “아직 산업단지별·기업별 구체적 감축 계획과 자구 노력의 그림이 보이지 않는다”며 “지금이 마지막 기회이며 석유화학 업계의 자율적인 사업 재편이 때를 놓치면 채권금융기관의 역할도 관찰자·조력자로만 머무르기 힘들 것”이라고 경고했다. 별다른 상황 진척이 없으면 은행권을 중심으로 강제 구조조정에 돌입하겠다는 뜻이다.
금융당국 "석화, 자산매각·증자·차입 모두 해야할 것"
금융 당국은 그동안 석화 업계의 선제적인 자구책이 마련돼야 금융 지원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그러나 대주주(한화·DL그룹) 간 이해관계가 다른 여천NCC를 비롯해 각 석화 기업들이 실효성 있는 구조조정 방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금융 당국의 판단이다.
금융 당국의 한 관계자는 “현재 석화 기업들은 자산 매각과 증자·차입 모두를 해야 할 것”이라며 “한두 가지만으로 해결이 되면 좋겠으나 지금 상황이 그렇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석유화학 업계가 올해 말까지 사업 재편 자구안을 내기로 협약을 맺은 지 한 달이 지났지만 서로 눈치작전을 펴면서 자율 협의가 공전하고 있다. 석화사와 정유사 간 나프타분해설비(NCC) 수직 계열화 추진이 큰 흐름으로 형성됐지만 기업마다 구조조정의 필요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석화 업계는 여수(LG화학·GS칼텍스), 대산(롯데케미칼·HD현대오일뱅크), 울산(SK지오센트릭·대한유화) 등 국내 3대 석화 산업단지에서 정유사와 석화사의 NCC 설비를 통폐합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하지만 기업 간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며 논의가 구체적인 성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특히 울산에서 SK와 협상을 벌이고 있는 대한유화는 자체적인 구조 혁신을 통해 적자에서 벗어날 것으로 보이자 NCC 통합 자체에 부정적 태도를 내비치는 것으로 알려졌다.
석화사들은 또 중국과 일본이 적극적인 구조조정으로 먼저 설비를 폐쇄하면 찾아올 상승 사이클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실제 에틸렌 수익 지표가 상승하기 시작하며 추세적 반등 조짐을 보이고 있다. 29일 기준 에틸렌 스프레드(원재료인 나프타와 에틸렌 가격 차이)는 톤당 220달러다. 손익분기점인 250달러보다 아직 낮지만 1년 전(131달러)에 비하면 68%나 올랐다.
하지만 금융 당국은 더 이상의 시간 끌기는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권대영 금융위 부위원장은 “시장과 채권 금융기관이 예의 주시하고 있다”며 “연말까지 기다릴 것 없이 시장에서 의구심을 걷어내고 의지와 실행력을 확인할 수 있도록 석화 업계가 구체적인 사업 재편 그림을 조속히 보여주기를 바란다”고 요구했다.
금융 당국은 석화 산업 구조조정을 미룰 수 없다고 보고 있다. 한국투자증권에 따르면 여천NCC의 부채비율(별도 기준)은 2023년 말 276.9%에서 올해 6월 말 현재 338%로 치솟았다. 1년 반 사이에 61.1%포인트나 뛴 것이다. HD현대오일뱅크와 롯데케미칼의 합작사인 HD현대케미칼의 부채비율은 같은 기간 221.8%에서 320%로 98.2%포인트나 상승했다.
이는 2019년부터 중국 석화 기업의 증설이 시작됐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기업들이 제때 설비 조정에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신용평가는 2017~2018년 한국 내 주요 석유화학제품 설비 가동률이 평균 93.5%에 달했지만 2019년부터 올해 6월 사이에는 81.4%로 떨어졌다고 추산했다. 이에 따라 국내 석화 생산능력을 18.4%는 감축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금융 당국과 채권단은 석화 기업을 계속 압박할 계획이다. 추 의원실이 입수한 채권 금융기관 자율협의회 운영 협약안을 보면 채권단은 석화 기업의 사업 재편, 재무 운용 계획 타당성을 검토할 수 있게 된다. 필요한 경우에는 외부 기관의 실사를 요구할 수도 있다.
석화 기업이 정당한 사유 없이 채권단 약정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채권단의 구조조정 지원 절차는 중단된다. 구조조정 지원이 멈춘다고 해도 채권단이 새로 지원한 자금에는 전액 상환 때까지 우선변제권이 붙게 된다. 금융 당국의 한 관계자는 “사실 만기 연장만으로도 지원 대상 기업에는 큰 도움이 되고 채권단에는 부담이 큰 부분”이라며 “일단 지원 방안을 마련했으니 자구책을 서둘러 만들라는 신호”라고 설명했다.
한편 구조조정이 미뤄지면서 석화 산업의 생산·고용 감소세가 심화하고 있다. 한국산업단지공단에 따르면 올해 2분기 여수 국가산단 입주 업체의 고용 인원은 2만 1125명으로 3년 전(2만 5096명)보다 15.8%나 감소했다. 올 1~6월 생산액 역시 41조 7412억 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6% 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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