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채권시장안정펀드 등 대규모 자금시장안정대책을 내놓았지만 단기자금시장은 여전히 얼어붙어 있다. 분기 말을 앞두고 단기자금 시장에서 급전을 구하는 기업들이 늘고 있는 가운데 단기채의 주요 수요처인 머니마켓펀드(MMF)나 증권·은행의 신탁상품에서 연일 뭉칫돈이 빠지면서 자금시장이 단단히 꼬였다. 운용사들은 환매에 대응하기 위해 단기채를 시장에 팔려고 하지만 수요처가 없어 단기금리는 더 뛰고, 신규 발행은 어려워지는 악순환이다. 업계에서는 채권시장안정펀드가 본격 가동되는 오는 4월이 오기 전에 단기자금시장의 경색이 심화될 수 있다는 우려를 내놓고 있다.
25일 업계에 따르면 신용등급 AAA인 신한금융지주가 전날 9개월짜리 기업어음(CP)을 연 3%에 발행하면서 시장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일반적으로 같은 등급의 1년짜리 CP 민평금리(민간채권평가회사의 평균금리)가 1.74%에 비해 고금리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신한금융지주의 경우 이마저도 인수자를 찾지 못해 당초 발행했던 목표액 5,000억원을 채우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더 짧은 만기인 3~6개월물과 합쳐 총 3,500억원만 이날 시장에서 소화됐다. 한국투자금융지주의 3개월 미만 CP 역시 2.6%에 거래됐다. 이 같은 상황은 25일에도 이어졌다. CP(신용등급A1) 91일물 금리는 이날 기준 1.87%로 전일 대비 0.22% 포인트 되레 올랐다.
국내 증권사의 한 자금담당 임원은 “대형 금융지주 단기물이 시장에서 소화되지 못해 고금리에 발행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금리를 불문하고 CP를 찍지 못하는 곳도 속출했다”며 “그나마 정부의 대책 발표 이후인 25일에는 고금리에라도 금융사 CP가 발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단기 자금시장은 여전히 꽁꽁 얼어붙어 있다”고 덧붙였다. 채권시장의 대형 호재가 아직 시장에 온전히 반영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단기자금시장 경색이 여전히 풀리지 않는 주된 이유 중 하나로 시장 관계자들은 단기채 수요처인 MMF에서 3월 분기 말을 앞두고 연일 이어지는 수조원대의 뭉칫돈 유출을 꼽고 있다. 기업과 기관투자가들이 원래 분기 말에 MMF 자금을 빼 나가는 게 일반적이지만 이번에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매출에 타격을 받을 우려가 커지자 더 적극적으로 환매에 나서고 있다.
특히 국공채 MMF와는 달리 일반(신종) MMF는 3개월 미만 CP·전자단기사채(전단채)를 담을 수 있어 그동안 가장 큰 수요처 중 하나였다. 그러나 총 12개 운용사의 법인용 신종 MMF 순자산은 지난 11일 기준 31조5,210억원이었으나 24일에는 23조5,638억원으로 약 8조원이나 빠져나갔다. 정부의 자금시장안정대책이 발표된 24일 하루 동안 3조원이 넘는 자금이 또다시 빠지며 25일 기준으로 20조4,416억원으로 더 쪼그라들었다. 한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법인들의 환매에 대응하기 위해 단기물을 내다 팔고 있는데 시장에서 전혀 소화가 안 된다”며 “이대로 가다가는 3월 말 전에 MMF 펀드 환매 중단이 나올지도 모른다”고 위기감을 털어놓았다. 다른 자문사 대표도 “현재 단기자금시장의 시한폭탄은 MMF”라며 “특히 이번 단기자금시장의 고비는 3월 말인데 정부가 자금 투입을 4월부터 한다고 하니 정책이 온전히 효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구체적인 채권 매입 방안을 내놓지 않은 점도 투자심리 회복을 지연시키고 있는 요인으로 꼽혔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문제가 되고 있는 증권사 보증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의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도 매입 대상에 포함되는지가 불분명하다”며 “하루빨리 채권 매입방안이 구체화돼야 시장의 불안감이 조금이나마 가실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부동산 PF ABCP는 13조원에 달한다. 이 자금들은 대부분 리스크에 취약한 대체투자와 부동산 개발 등과 연관돼 있다는 점에서 자칫 리파이낸싱이 불가능해질 경우 증권사의 자금 사정을 더욱 악화시킬 위험이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단기자금 수요는 여전히 강하다. 증권사들은 해외 주가연계증권(ELS)과 부동산 PF ABCP 자금수요로 단기자금시장에서 자금조달을 하고 있는 형편이다. 수출 대기업이나 정유사들 역시 단기 CP를 찍고 있다. 채권시장 관계자는 “평소에는 회사채를 찍어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기업들도 회사채시장이 얼어붙으면서 단기자금시장에서 급전을 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자금수요처는 넘치는데 이를 받아줄 곳이 없어 단기자금시장이 꼬여 있는 셈이다. /이혜진·김민경·이완기기자 hasim@sedaily.com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