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증시가 미국의 ‘초긴축 펀치’를 정통으로 얻어맞았다. 달러화 기준 주요 20개국(G20) 중 가장 가파른 하락세를 기록한 국내 증시는 1년 만에 시가총액의 3분의 1이 사라졌다. 킹달러 여파로 외국인들의 셀코리아가 가속화되는 가운데 증시 예탁금이 2년 전 수준으로 하락하는 등 개인 투자자들도 백기를 들고 짐을 싸고 있다. 한 달 만에 코스피지수가 13% 이상 빠지며 공포감이 감돌았던 올 6월의 급락장이 재연될 조짐을 보이고 연저점 붕괴를 코앞에 둔 상황에서 금융 당국은 아직까지 이렇다 할 증시 안정 관련 대책을 내놓지 않고 있다. 증시가 이미 초토화됐는데 당국이 신용융자담보비율 유지 의무 완화, 불법 공매도 규제 강화, 자사주 매입 한도 완화 등의 언 발에 오줌 누기식 뒷북 대책만 내놓았던 상황이 이번에도 반복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G20 하락률 1위…탈출 행렬에 가담한 개인=코스피는 23일 2290.00으로 장을 마쳤다. 지난해 7월 6일 사상 최고치인 3305.21을 기록한 지 14개월 만에 30%가 급락했다. 시총으로 보면 2314조 4174억 원에서 1804조 5000억 원으로 509조 9174억 원이 말라버렸다. ‘코스피의 대장’인 삼성전자(005930)급 기업 1.5개가 증시에서 빠진 셈이다.
코스닥이라고 다르지 않다. 지난해 8월 9일 1060.00을 찍은 이후 23일 종가(729.36) 기준 31.2% 급락했다. 시총은 443조 860억 원에서 332조 9038억 원으로 110조 1822억 원이 사라졌다. 국내 주요 기업 역시 52주 신저가를 잇달아 기록하고 있다. 코스피 시총 1위 삼성전자는 지난해 7월 6일 8만 1200원에서 23일 5만 4500원으로 32.9% 폭락했다. 시총은 159조 원 줄었다. SK하이닉스(000660)는 33.2%를 조정받아 시총 30조 원이 축소됐다. 카카오(035720)(61.3%), 네이버(48.6%) 역시 급락했다.
국내 주식 시장은 유독 외부 변수에 취약한 모습이다. 대신증권과 블룸버그가 올해 초부터 이달 22일까지 G20 국가 주요 증시 지수의 달러 표시 환산 지수를 비교한 결과 코스피는 33.58% 하락하며 가장 큰 낙폭을 기록했다. 아시아에서도 일본(닛케이225·24.4%)이나 중국(홍콩항셍·24.8%) 대비 유독 변동성이 더 컸다. 대신증권은 “경상수지 흑자 규모가 무역수지 적자 흐름으로 축소되면서 원화 약세 압력이 가중됐다”고 분석했다.
지금까지는 킹달러 영향으로 외국인들이 팔자로 돌아선 것이 주된 이유였다. 하지만 이제는 개인들도 떠나고 있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투자자예탁금은 21일 기준 50조 7793억 원으로 올해 최저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2020년 8월 12일(50조 2996억 원) 이후 최저 수준이다. 금리 인상에 대출을 갚거나 예금 등으로 눈을 돌린 것이 이유로 보인다. 신용 거래 융자 잔액 역시 22일 18조 9134억 원으로 코로나19 이후 최저 수준이다.
거래 대금도 급감했다. 이달 기준 하루 평균 7조 4000억 원을 기록하고 있다. 올해 1월만 해도 국내 주식 시장은 하루 20조 원대 거래가 오갔다. 손절매나 일부 테마주 등에만 거래가 쏠리는 모습이다.
당분간 국내 증시 하락세는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4분기 삼성전자를 포함 국내 주요 기업들의 실적 전망이 악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만의 시장조사 업체 트렌드포스는 수요 위축에 과잉 재고가 맞물려 4분기 D램 가격이 3분기보다 15∼18% 하락할 것으로 예상됐다. D램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주력 제품군이다. 안영진 SK증권 연구원은 “금리 수준은 최근 새롭게 수정된 내용이기에 충분히 주식시장에 반영됐다기보다는 반영돼 가는 중으로 보는 게 맞을 것”이라며 “연저점 방어도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뒷북 대책 반복하나…당국 “증안 대책은 아직”=증시 급락세가 재연되고 있지만 금융위는 23일 ‘재탕 대책’만 꺼냈다. 신용융자담보비율 유지 의무 면제 및 자사주 취득 한도 확대 조치를 연장한다는 방안을 발표했다. 7월 초 조치의 연장일 뿐이다.
이에 좀 더 적극적이고 선제적인 컨틴전시 플랜을 밝힐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금융시장의 불안이 실물 부문으로 전이돼 시스템 리스크가 현실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증시안정화펀드(증안펀드)가 대표적이다. 코로나19 확산 초기에 정부는 총 30조 원 규모의 채권·증권시장안정펀드 지원을 통해 증시를 부양한 적이 있다. 금융위원회 역시 증안펀드나 공매도 제한 등 기존 대책을 염두에 두고 있다. 김소영 금융위 부위원장은 23일 금융시장 합동 점검 회의에서 “시장 변동성 완화 조치를 적시에 가동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달라”고 말하기도 했다.
다만 금융위는 환율 변동성이 커진 것이 우리 증시 하락의 주된 이유인 만큼 아직은 상황을 좀 더 지켜보겠다는 입장이다. 이윤수 금융위 자본시장정책관은 “시장 안정 조치가 당장 필요한 상황으로는 보지 않는다”며 “유동성 문제가 생기면 증안펀드를, 공매도가 문제라면 공매도 제한 조치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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