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5일 열린 삼성물산 부당합병 및 회계부정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으면서 사법 족쇄를 벗었다. 2017년 2월 첫 구속기소 이후 7년 만이다. 사법 족쇄의 후폭풍은 컸다. 반도체 초격차를 위한 인수합병(M&A)의 골든타임을 놓쳤고 파운드리 경쟁력 확보, 바이오 등 신수종 산업으로의 확산도 어려웠다. 잦은 출석, 해외 경영 활동의 제약은 물론 법의 잣대를 어깨에 짊어진 심리적 위축이 그만큼 컸던 것이다. 삼성그룹 계열사의 한 전임 사장은 “이 회장이 3년 동안 거의 매주 법원에 출석해 하루종일 법원에 매달려 있으면서 공격적 사업 판단이 어려웠고 인사나 조직 개편도 소극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며 “이번 1심 선고를 계기로 고(故) 이건희 선대 회장의 그늘을 벗어난 ‘JY 경영’의 색깔이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 안팎에서 보는 이 회장의 숙제는 △메모리반도체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바이오 등 3대 과제로 귀결된다. 삼성이 하는 사업 중 어느 것 하나 국가 경쟁력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분야가 없지만 이 3대 사업이야말로 삼성은 물론 국가의 생존까지 가를 수 있는 중요한 사업이라는 것이다.
당장 메모리반도체는 초격차를 유지해 1등을 수성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그동안 ‘메모리 1등은 삼성’이라는 말이 공식처럼 받아들여져 왔지만 최근에는 상황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실제 시장조사 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 삼성전자의 D램 점유율은 38.9%로 SK하이닉스(34.3%)에 턱밑까지 추격을 허용했다. 특히 차세대 메모리라고 불리는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에서 SK하이닉스에 주도권을 내준 게 뼈아프다. 전체 D램 시장에서 HBM이 차지하는 매출 비중은 올해 20% 안팎까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TSMC에 이어 전 세계 2위를 달리고 있는 파운드리 분야에서도 체질 개선이 요구된다. 특히 미국 인텔이 파운드리 사업에 대한 재도전을 선언한 가운데 중국 1위 파운드리인 SMIC도 최근 대대적인 시설 투자를 단행하고 있다. 3㎚(나노미터·1㎚=10억분의 1m)급 이하 선단 공정에서는 TSMC·인텔과 경쟁을 펼치고 레거시(구형) 공정에서는 중국과 맞서야 하는 게 삼성전자의 현주소인 셈이다.
반도체 업계의 한 고위 관계자는 “삼성이 2030년 파운드리 1위를 선언했지만 인텔은 이 기간 내 2위에 오르겠다고 발표했다”며 “무조건 1위만 외칠 게 아니라 2등이라도 제대로 지키면서 성장 전략을 수립해야 할 상황”이라고 말했다.
바이오 분야에서는 현재 위탁개발생산(CDMO) 분야에서 신약 개발로 ‘퀀텀점프’가 필요하다는 분석이 많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지난해 영업이익 1조 1137억 원으로 첫 ‘1조 클럽’에 가입하는 성과를 냈지만 최근 바이오 업계 최대 화두인 항체약물접합체(ADC) 분야와 신약 개발 분야에서는 아직 실적을 내지 못하고 있다. 바이오 업계에서 연구개발(R&D)로 기술 격차를 따라잡기는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시장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빅딜’이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투자은행(IB) 업계의 한 관계자는 “삼성이 2016년 말 9조 원을 들여 하만을 인수하면서 대규모 M&A 시장에 뛰어들었지만 이듬해 이 회장이 구속된 후 대형 딜이 실종됐다”며 “당장 수십조 짜리 딜은 아니더라도 올해부터 검토 거래 수가 늘어날 수 있다”고 내다봤다.
3대 주력 성장 사업과 별도로 신성장 동력을 발굴해내는 것도 향후 이 회장의 과제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앞서 이 선대회장은 2010년 자동차 배터리와 바이오 등을 신수종 사업으로 지목해 삼성의 미래를 제시한 바 있다. 이 회장 또한 지난해 말 미래사업기획단을 신설한 뒤 전영현 부회장을 단장으로 임명해 신사업 발굴을 지시했다.
재계에서는 인공지능(AI)·로봇 등을 유력한 신사업으로 보고 있다. 삼성이 강점을 가지고 있는 반도체 및 배터리와 모두 깊은 연관이 있는 사업이기 때문이다. 미래사업기획단을 이끄는 전 부회장부터가 메모리반도체와 배터리 분야에서 삼성을 세계 일류로 키워내 성과를 인정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김용진 서강대 경영학과 교수는 “AI 위주로 글로벌 산업이 빠르게 재편되고 있어 메모리반도체 우위만으로는 사업을 주도하기 어렵다”며 “비메모리 육성에 더해 AI·로봇 등을 모두 더해 하나의 산업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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